
다정하게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연인들,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 밭에서 땀을 흘리며 노동하는 농부들.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한 이런 장면들은 명화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17세기 이전에는 이런 소재는 거의 취급되지 않았다. 이런 소재가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거슬러 올라가면 16세기 화가 피터르 브뤼헐로부터 비롯된다.
브뤼헐은 '농부의 결혼식' 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화간데 그는 일상을 소재로 한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를 주제로 삼았던 최초의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당시 그림은 후원자들의 주문에 의해서 제작되었고 작품이 설치될 장소도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주문자가 선호하는 그림, 이를테면 초상화, 신화화, 종교화 같은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브뤼헐은 그런 그림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그림을 그림으로써 풍속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단순히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에 끝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그림 속에 등장한 적이 없었던 소외되고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부각했다는 점에 있어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었다.
1528년경 네덜란드의 브레다에서 태어난 브뤼헐은 유년 시절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형성 과정에 대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의 작품들이 쏟아져나온 것은 1560년경부터였는데 1569년 사망했기 때문에 왕성한 작품활동 기간은 10년이 채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짧은 기간 동안 풍속화라는 새로운 장을 개척한 그는 위대한 화가였음이 틀림없다.
브뤼헐의 작품은 그 연대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는 주로 초창기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큰 화폭에 수많은 인물을 빼곡하게 그려 넣는 형식이다. 두 번째는 자연의 위대함과 거기서 살아가는 겸허한 인간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세 번째는 인물을 화폭의 중심에 자리시켜 풍자적이거나 해학적으로 인간의 삶과 애환을 묘사하는 형식이다.
초기의 방식은 화면에 인물을 빼곡하게 가득 채운 방식으로 대표적인 그림으론 '플랑드르의 속담' 이 있다. 이런 형식의 그림은 주인공이 따로 없기 때문에 장면 장면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수많은 동물, 인물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제목에서 나타낸 것처럼 속담을 그림으로 그린 일종의 일러스트레이션이다. 여기엔 120가지나 되는 그 당시 플랑드르의 속담이 등장한다. 이런 형식의 그림은 플랑드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회화인데 원근법을 무시하고 동양화의 방식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림을 그려 나갔다. 이런 방식은 비례와 원근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장면을 원하는 만큼 넓게 펼쳐 표현해 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브뤼헐은 이 작품을 기점으로 유사한 방식의 그림들을 남겼는데 '아이들의 놀이', '죽음의 승리', '카니발과 사순절의 전투' 같은 그림들이 있다. 특히 '아이들의 놀이' 같은 그림을 보면 시골 마을을 무대로 수많은 아이가 팽이치기, 굴렁쇠굴리기, 말타기, 철봉 놀이, 씨름하기, 물구나무서기 등등 온갖 종류의 놀이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주제는 브뤼헐 이전에는 취급된 적이 없는 주제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깊다.
다양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다룬 그림을 그렸던 브뤼헐은 1565년 이후 자연으로 그 관심을 옮겨가는데 달력을 만들기 위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눈 속의 사냥꾼들'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계절에 따른 자연의 모습과 그 안에 인간의 노동을 주제로 하는 이 작품은 달력의 1월이나 2월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여기서 그림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닌 풍경이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인 풍경과 그 한쪽 구석에 보이는 사냥꾼들과 사냥개의 모습은 거대한 자연 앞에 작은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과 삶의 무게로 힘겨워 보이는 사냥꾼과 사냥개 너머로 보이는 자연의 웅장한 모습을 잘 표현한 그림이다. 이런 달력 그림은 총 5점이 남아있다. 미술사에서 이런 풍경을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는데 이런 점에서 브뤼헐은 풍경화에서도 선구자 역할을 한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브뤼헐이 그린 성화에서도 나타나는데 성서의 인물이나 성인들을 중심에 놓는 일반적인 종교화와 다르게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여러 사람을 배치함으로써 성서의 주인공이 누군지 잘 알아볼 수 없게 표현한 점에서 브뤼헐만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브뤼헐의 후기 작품은 화가의 시선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가면서 인간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도록 유도한다. 대표작으로는 '농부의 결혼식' 이 있다. 이 그림에는 주인공인 신부와 신부의 부모, 성직자와 마을의 권력자, 악사와 동네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만 신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당시 네덜란드 속담에는 '자신의 결혼식에 불참한 불쌍한 신랑' 이라는 속담이 있었는데 이 속담에 따라 신랑이 자리에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그림은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는데 당시 베네치아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대각선 구도를 활용해 바닥을 많이 보여줌으로써 많은 인물이 등장함에 따르는 복잡한 느낌을 많이 줄여주었다. 색채 감각 또한 뛰어난데 전체적으로 누런색을 바탕으로 할 때는 흰색이나 빨강으로 포인트를 줬고 인물마다 같은 색을 넓게 칠함으로 입체적인 느낌과 단순한 느낌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인물들이 모두 먹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그 행위의 모습이 다양해 보이게 나타낸 점에서 작가의 뛰어난 관찰력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다른 작품인 '식도락가의 마을','장님들의 우화','앉은뱅이들', '염세주의자' 등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브뤼헐은 인간의 현실과 자연의 예리한 관찰을 통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지배층보다 서민이나 소외계층의 삶을 보여주었고 이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나름의 애정 어린 시각으로 표현해냈다. 그는 이러한 모습을 직접적인 날카로운 비판보다 풍자와 해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했다. 그의 작품은 풍속적이고 시사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일러스트레이션의 개념과 일치하는데 이것이 일러스트레이션의 근원을 과거의 명화로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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